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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통 = 힘줄과 근육이 뼈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통증
성장통의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뼈의 성장 속도를 힘줄과 근육이 따라가지 못했을 때 성장통을 겪는 것으로 추정한다. 한니발로 성장통과 유사한 질환을 이야기했다.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계속 평화로울 수는 없다. 국외에는 적이 없다 해도 국내에 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외부의 적이 접근하지 못하는 건강한 육체라도, 그 육체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내장 질환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니발 리비우스의 로마사에서
성장통이든 내장 질환이든 그 핵심에는 급격한 성장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의 바다)으로 만들 정도로 성장하였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듯이 로마는 포에니 전쟁 이후로 성장의 탄력을 받는다. 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사는 대외적으로는 성장을 하지만 대내적으로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로마는 성장통을 겪는 중이었다.
뛰어난 개인의 이야기
왕정 이후 로마는 공화정을 정치 체제로 선택하였다. 공화정 로마는 집정관, 원로원, 민회를 중심으로 권력을 분립하여 어느 개인도 혹은 어느 집단도 독재를 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왕정 시대의 로마는 성군 치하에서는 평화로웠지만 폭군 치하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을 알기에 한 개인에 의한 독재를 지양했다. 그렇다고 아테네와 같은 민주정은 중우 정치로 변질되는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로마는 공화정을 선택하면서 '공공성'을 강조했다.
공화정 로마에서는 개인의 실력보다는 공공을 위한 체제의 안정성을 중시한다. 그 중심에는 원로원이 있다. 원로원을 중심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개인에 의해서 국가의 방향성이 휘둘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공화정 로마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공화정 말기의 로마의 역사는 뛰어난 개인들의 역사이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젊은 시절 화려한 데뷔를 알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서 시작된 서사는 그라쿠스 형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로 이어진다. 독재를 무엇보다 경계했던 공화정 로마는 뛰어난 개인들의 자신의 재능을 한껏 보이는 경쟁의 장이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 - 수면 위로 드러난 문제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가장 큰 변화는 영토가 확장되었다는 것과 노예 노동력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확장된 토지와 노예 노동력이 결합하여서 원로원을 중심으로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은 대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한다. 속주에 있는 대농장으로부터 싼 값에 곡물이 로마로 유입되면서 이탈리아 반도 내의 로마 시민 자영농들의 농업 경쟁력이 떨어진다. 영토 증가를 통해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고 나라의 곳간은 풍요로워졌지만, 정작 로마 내에 있는 시민들은 궁핍한 지경에 이르렀다.
로마 시민의 경제 문제는 국방 문제로 이어진다. 로마의 국방력은 로마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로마 시민이라면 군 복무는 세금으로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 오직 경제적으로 일정 규모 이하의 자산을 가진 무산 계급만 국방의 의무를 면제받는다. 하지만 농민으로서의 로마 시민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못한지라 자연스럽데 군 복무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의 수도 줄어들었다. 인구수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무산 계급이 늘어난 것이다. 따라서 일정 규모의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서 하한선이 점차 낮아졌다. 이로 인해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차출되는 로마 시민이 생기게 되었다. 경제 문제는 결국 국방력 약화로 이어지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라쿠스 형제가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은 로마 시민들의 경제력 약화이다. 그라쿠스 형제는 농지법을 기반으로 부의 독점을 막고 곡물법, 식민지법을 통해 로마 시민의 경제력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개혁은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문제를 파악하는 눈은 정확했지만 안타깝게도 사회의 저항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 분열의 시작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등장과 함께 로마는 분열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 정치의 기득권 귀족은 아니다. 오직 군사적인 능력으로 높은 지위까지 오른다. 유구르타 전쟁은 그의 화려한 데뷔 무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그라쿠스 형제에서부터 이어온 사회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모병제를 도입함으로써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무산 계급과 도시 빈민층의 실업 문제를 해결했다. 사회 문제 해결뿐만이 아니라 아무런 연줄도 없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수많은 클리엔테스가 생겼다. 심지어 당대에는 유구르타 전쟁뿐만 아니라 게르만 족의 남하를 저지하는 등 군대가 필요한 상황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마리우스는 민중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정반대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국정 안정을 추구하였다. 마리우스와 술라는 서로 자신의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 로마 사회를 분열시키는데 한 몫했다. 최종적으로 승기를 잡은 이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이다. 술라는 군대를 앞세워 로마를 차지하고 독재관 자리에 올라 로마 공화정을 개혁한다. 그의 개혁의 핵심은 실력 있는 개인이 아닌 원로원에 의해서 국정이 운영되는 것이다. 원로원의 수를 늘리고 연공서열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민중을 결집하여서 집단행동을 이끌었던 호민관을 약화시킴으로써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 체제가 담기에는 너무 뛰어난 인물
술라는 공화정이라는 가죽 부대를 수선하였다. 그에게는 집단보다 뛰어난 개인은 없다고 믿었다. 심지어 독재관 임기가 남아있음에도 자신의 권력을 내놓고 집단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도록 하였다.
문제는 그 휘하에 있던 폼페이우스는 수선된 가죽 부대가 담기에는 너무나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원로원의 연공서열을 무시할 정도로 국내외 문제 해결에 있어서 폼페이우스가 보여준 활약이 상당하다. 술라의 반대파인 세르토리우스를 에스파냐까지 추격하고 미트라다테스가 일으킨 전쟁을 승리함으로써 소아시아 지역을 평정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술라가 만들어놓았던 집정관 나이 제한 문제와 같은 집단의 규칙을 무시한다. 개인에 의해서 집단이 좌지우지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인정한 진정한 뛰어난 개인의 자리는 폼페이우스가 아니다.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카이우스가 영광스러운 칭호의 주인이 된다. 이제 로마 공화정은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힘을 잃은 원로원, 사회적 불안과 함께 시대는 집단에 의한 안정적 운영보다는 뛰어난 개인의 리드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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