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야카 시치리의 소설 언제까지나 쇼팽의 Review 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클래식과 소설
클래식은 귀로 듣는 예술이다. 하지만 소설은 시각을 통해서만 경험된다. 따라서 음악을 다루는 소설의 주된 과제는 듣는 것을 시각화하는 방법이다. 음악을 문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생함이 전달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이를 탁월하게 수행한 작품은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 밖에 없는 줄 알았다. 이 소설을 읽고 리스트에 '언제까지나 쇼팽'도 추가하였다.
공교롭게도 '꿀벌과 천둥', '언제까지나 쇼팽'에서 모두 천재 피아니스트와 이를 바라보는 준재 피아니스트가 등장한다. 여기서 준재 피아니스트의 역할은 천재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쇼팽'에서는 이 역할을 얀 스테판스가 맡는다. 그가 전달하는 구절 하나하나는 적절한 비유를 통해 쇼팽의 연주를 상상하게 만든다. 실제로 쇼팽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 설명을 들으면 얀이 무엇에 감동하였는지 공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쇼팽의 연주를 전달해주어서 고마웠다. 클래식을 다루는 소설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피아노를 치고 싶어!'이다. 그만큼 그들에 의해서 전달되는 연주가 감미로웠기 때문이다. 다시금 피아노 커버를 열고 쇼팽의 에튀드 악보를 펼쳐본다.
쇼팽의 저항 정신
예술은 예술이고 정치는 정치다. 특히 작품 외적으로 작가의 프라이버시와 같은 문제는 최대한 배제하고 소설을 즐기고 싶다. 하지만 쇼팽의 저항 정신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일본 작가라는 것이 다소 불편하게 다가왔다.
쇼팽은 나치의 침공으로 함락한 폴란드의 상징이다. 음악을 통해 그는 고국을 그리워했고 분노했다. 상처 입었을지언정 음악으로 불굴의 정신을 드러냈다. 소설에서도 등장하는 '쇼팽다움'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으며 이를 일본인 피아니스트에 의해서 재현되는 것이 한국인으로서 불편했다.
작가가 군국주의를 정당화하거나 지지하는 듯한 묘사가 소설에 등장한 것도 아니다. 다만 폴란드의 역사를 보고 그리고 불굴의 쇼팽을 보고 한국의 역사가 떠올랐을 뿐이다. 다소 개인적인 투정이라고만 생각하길 바란다. 나는 아직도 이 작가의 소설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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